우리가 커피를 마실 때, 그 커피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재배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도착했는지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몰라도 커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으니까요.
스페셜티 커피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가치 중에는 품질(Quality) 말고도 추적가능성(Traceability)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있습니다.
커피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커피가 생산되는 환경과 관련 종사자들의 삶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조금 다릅니다.
생산자의 이름을 알게 된다고 커피가 더 맛있어지는 것도 아니고, 환경이나 노동 조건이 나아진다고 해서 당장 내가 지불하는 커피값이 저렴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페셜티 커피는 그것들 때문에 더 비싼 커피가 되었죠.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소비자가 직접적인 이익을 체감하기 가장 어려운 가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스페셜티 커피를 이야기할 때 새로운 향미와 품질에만 집중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고 불편합니다.
물론 품질은 중요합니다. 좋은 커피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스페셜티 커피는 좋은 품질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품질이 스페셜티 커피의 출발점이라면, 추적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은 커피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추구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일하는 환경과 삶을 지켜나가기 위한, 넓은 의미에서는 일종의 노동 운동이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는데도, 저는 왜 이런 가치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를 일상에서도 체감하는 요즘에도, 세상에는 여전히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좋은 커피가 무수히 많습니다.
서로 다른 자연환경에서 자란 커피들이 저마다 다른 향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흥미롭고, 새로운 커피를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는 이 즐거움은 결코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커피나무가 자라는 자연환경이 있고, 그것을 가꾸는 생산자들이 있으며, 커피 한 잔이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이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추적가능성은 그 연결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고, 지속가능성은 그 연결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모르는 것이 많고, 제가 내리는 선택이 실제로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치들을 놓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커피를 앞으로도 계속 발견하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즐거움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과 사람들도 함께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같은 생각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그저 맛있기 때문이어도 충분하니까요.
다만 커피를 선택하고 소개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소비자가 미처 알지 못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까지 고민하는 것은 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알아주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이 당장의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하는 일을 어떤 기준과 태도로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한 잔의 커피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커피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이 글이 일종의 선언문처럼 보이셨나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몇 달 후면 커피를 직업으로 삼은지 17년째가 되는데, 더 늦기 전에 잃어가던 것들을 붙잡고 싶었거든요.
어쩌면 이 글은 커피를 마시는 누군가에게보다, 앞으로도 커피를 하며 살아갈 저 자신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